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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럽 찾으럼 감.

비비안 리Vivien Leigh,그녀의 생애,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로런스 올리비에.

by adams99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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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리
비비안 리

본명-Vivian Mary Hartly 비비안 메리 하틀리

비비안 리 Vivien Leigh

출생-1931년 11월 5일, 인도 제국 웨스트벵골 다질링

사망-1967년 7월 8일 (향년 53세), 잉글랜드 런던

별자리-전갈자리

띠-소띠

국적-영국

직업-배우

신체-160cm

학력-왕립 연극학교

데뷔-1935년 영화 Things Are Looking Up

 

수상-

1963 토니상 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

1953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51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1951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1952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39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1940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배우자-허버트 리 홀먼(1932년~1940년,이혼)

          -로런스 올리비에(1940년~1960년, 이혼)

가족관계-딸:수잰 리 홀먼(1933년생)

파트너-존 잭 메리베일(1960년~1967년)

종교-가톨릭

비비안-리-어린-시절
비비안 리, 어린 시절

인도 뱅골 다질링에서 태어난 비비안 리는 어머니의 부유한 가족이 그녀에게 부여한 특권을 기뻐하며 부유하게 자랐다. 외할아버지가 인도 혼혈로, 어머니로부터 인도 피를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승마를 탔으며, 외환 중개인인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격동의 시기에 인도 제국군에서 조국을 위해 복무했다.

독실한 가톨릭 교육의 품에서 자란 어린 비비안은 가톨릭 미션 스쿨에 다녔다. 6살의 어린 나이에 그녀는 영국의 미션 스쿨로 편입했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배웠고 나중에는 영화배우가 되는 학교 친구의 형향을 받아 배우를 꿈꾸게 됐다.

 

*파란색 눈의 소유자다.

 

학교 연극 무대에 서며, 다정한 아버지와 함께 비비안은 1931년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여행 내내 그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교에 다니고 두 언어를 마스터하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비비안은 부모의 지원을 받아 런던의 존경받는 왕립 극장 학교에서 정식 연기 교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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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3살 연상의 상급법원 변호사 리 홀먼과 사랑에 빠져 연기에 흥미를 잃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배우와 닮은 하버트 리 홀만에게 반해 약혼녀가 있는 상태였지만, 개의치 않았고 결국 그와 1932년 12월 결혼을 하면서 비비안 리 홀먼이 되었고 학교도 그만두게 됐다. 그러다 몇 주 뒤 단조로운 일상에 지쳤는지 1933년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학교에 복학했다. 그리고 출산 후 아기는 유모에게 맡기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탐탁지 않았지만 그녀의 열정에 대해서 방해하진 않았다.

 

1935년 친구의 요청으로 비비안은 영화 단역에 출연하고 활동명에서 홀먼이란 이름을 에이전트의 제안으로 뺏다. a에서 e로 바꿔 좀 더 있어 보이게 만들자 제안했던 것도 이 에이전트였다. 따라서 Vivian Leigh는 매력과 매력을 발산하는 이름인 Vivien Leigh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 철자를 약간 변경하여 매혹적인 영향을 미쳤다. 친한 측근들 사이에선 비브 Viv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리의 첫 무대 공연은 "정절의 가면극"이라는 연극에서 앙리에트 역으로 연기했다. 1760년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 연극은 순진한 처녀로 변장해 후작과 결혼한 사창가 여인이 명예를 잃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연기 역할로 리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이때부터 리의 정신 건강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부담감을 감당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평론가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리는 이 시기에 자신을 훌륭한 배우라고 칭찬한 평론가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올리비에와의 만남

비비안-리-올리비에
비비안 리와 올리비에

비비안 리는 연극 단역이나 사진모델을 시작하며, 영국 연극계의 프린스인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나게 된다. 리 보다 6살 연상의 배우인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녀의 놀라운 무대 데뷔를 목격한 후, 어느 날 아내 질 에스몬드와 함께 호텔에서 식사를 하던 중 올리비에에게 리가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리는 이 만남 직후, 친구에게 올리비에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후 리와 올리비에는 1037년 영화 '파이어 오버 잉글랜드'에서 함께 작업했다.

 

두 배우는 영화 제작 기간 동안 열애를 시작했다. 리와 올리비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올드 빅 극장에서 공연하는 무대도 함께 출연했다. 리와 올리비에 부부는 처음에는 각자의 배우자와 이혼하고 함께 지내려고 했지만 배우자의 반대에 부딪혀 이혼을 하진 못했다. 그 결과 리와 올리비에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함께 동거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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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오하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오하라 역

1938년 초, 프로듀서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영광의 전투'와 '옥스퍼드의 영웅'을 본 뒤 스칼렛 오하라 역의 출연진에 리를 포함시켜 달라고 특별 요청했다. 리의 미국 에이전시 대표이자 데이비드의 동생이던 마이런 셀즈닉은 1938년 여름 협상 과정에서 앨릭산더 코더와 데이빗 O. 셀즈닉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폴레트 가르다드의 참여 가능성이 있었지만, 찰리 채플린과의 관계로 인한 스캔들로, 데이비드 O. 셀즈닉은 12월 미국에서 진행한 그녀의 스크린 테스트에서 깊은 인상을 얻고 마지막 순간에 리를 선택했다.

 

무명의 영국 배우가 전형적인'남부 미녀'를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대중의 회의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리는 예상을 뒤엎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녀의 성공은 그녀의 연인 올리비에를 능가하는 명성과 인지도를 얻었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촬영 내내 원작 소설의 열렬한 팬이었던 리는 원작 소설을 늘 곁에 두고 촬영에 임했으며, 이를 통해 원작에 충실한 캐릭터를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비비안 리는 클라크 게이블과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과 친분을 유지했지만, 레슬리 하워드와는 앙숙 관계였다고 한다.

 

*허리가 19인치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코르셋을 조인 상태에서 쟀을 때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할 때 리의 허리 치수는 23인치였다.

 

올리비에와의 결혼 생활

1940-아카데미-시상식
1940 아카데미 시상식, 리와 올리비에

1940년 리와 올리비에는 이전 남편과 이혼을 마무리하고 로스앤젤레스 산타바바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모두 자녀 양육권을 얻지 못했지만, 리는 전남편과 사망할 때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캐서린 헵번은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서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남편과 이혼 후 거의 만나지 못했던 딸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로 떠났다. 언론은 리를 '스칼렛'이라고 부르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현지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심지어 딸은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 결과 다른 학생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로 딸은 수녀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일반 학교로 전학해야 됐다. 이후 딸은 전남편과 할머니가 키웠다.

 

결혼 직 후 리와 올리비에는 엠마 해밀턴의 전기 영화인 '해밀턴 부인'에 출연했다. 올리비에가 연인 호레이쇼 넬슨을 연기한 반면, 리는 도덕적 기준에 타협한 인물을 연기하며 말년에 자신의 경험을 반영했다. 영화에서 해밀턴 부인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넬슨과 전성기의 화려함을 모두 잃는다. 이후 '안티고네'등 올리비에가 감독하거나 주연을 맡은 연극에 주로 출연했다. 영화보다 연극을 선호했던 그녀는 '안나 카레니나'를 포함해 6편의 영화만 더 찍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리에게만 국한 됫 것은 아닌, 당시 영국 배우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던 태도였다.


리는 올리비에와 함께 영화 배역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연극에서의 성공과는 달리 영화계에서는 거듭된 실망에 직면했다. 1939년 개봉한 '폭풍의 언덕'의 경우 올리비에가 제작사를 설득해 히스클리프 역의 상대역인 캐시 역으로 캐스팅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회사는 결국 거부했다. 리는 대신 이사벨라 역을 제안했지만, 원하는 수준의 출연료를 협상하지 못해 이 계획은 무산됐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레베카'(1940)에서도 올리비에만 붑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O, 셀즈닉과 히치콕, 그리고 조지 쿠코 감독은 리가 이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셀즈닉은 리와 올리비에의 관계를 둘러싼 스캔들을 우려해, 두 사람의 이혼이 마무리될 때까지 함께 작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리는 양극성장애가 악화된 무대 공연에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다.'로미오와 줄리엣"(1940)과 같은 작품은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일부 비평가들은 올리비에가 리의 연기를 망쳤다고 비난한 반면, 다른 비평가들은 리가 올리비에의 연기를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완벽주의자였던 리는 부정적 평가에 집착을 보였고, 자신을 위로하려는 올리비에의 시도조차 거부했다. 때때로 실제 상황을 넘어선 비판이 이어지자 올리비에는 비평가들이 미모 때문에 리의 연기를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리와 올리비에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제작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비평적 호평과 흥행 성적 모두에 참패를 경험했다.

 

리는 건강 상태는 악화되어 가고 유산이 반복되고 양극성장애가 악화되었다. 그녀의 상태는 통제할 수 없게 되어 발작과 폭력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특히 끔찍한 사건은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945) 촬영 중 촬영장에서 리가 넘어져 유산을 겪었다.

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리는 욕설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심지어 중재하려는 올리비에를 폭행하는 등 공격적인 행동을 보였다. 결국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울면서 실신한다. 의식을 되찾을 때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리는 극장 투어 도중 자주 중도 포기하거나 돌아와야 했다.

올리비에는 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평범한 척하다가도 혼자 있을 때만 내면의 '악마'를 자신 앞에서만 표출한다고 했다. 

 

1944년 리는 북아프리카로 군인 위문 투어를 떠났지만, 몇 주 동안 고열과 기침이 지속된 끝에 왼쪽 폐에 폐결핵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리의 상태는 심각했고, 투병 중에도 하루에 네 갑이 넘는 담배를 피우는 등 흡연을 계속했다.


리는 1948년 6개월간의 호주 투어 기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고, 종종 연기를 대역에게 넘기기도 했고 잦은 부부 갈등이 있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공연에서 리가 신발을 찾지 못해 무대에 오르기를 거부하자, 올리비에가 리의 얼굴을 때렸다. 이에 리는 올리비에의 얼굴을 때리며 보복했다. 올리비에의 회고록에는 '나는 호주에서 비비안을 잃었다'라고 말했다. 이 시기부터 리와 올리비에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리는 '여전히 올리비에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남매 같은 사이가 됐다'며 올리비에와의 관계가 남매의 정으로 발전했음을 표현했다. 올리비에 역시 자서전"어느 배우의 고백"에서 이러한 감정을 언급했다. 실제로 리가 올리비에에게 말했다고 한다.

 

올리비에는 호주에서 활동하던 시절 핀치의 재능을 알아보고 영국에 있는 자신의 극단에 입단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핀치는 올리비에, 리 부부와 가까워졌고, 리와 핀치 사이에도 관계가 발전됐다. 두 사람의 불륜은 이미 호주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올리비에가 런던으로 돌아온 후에야 이를 알게 됐다. 올리비에는 핀치의 멘토이자 고용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해고하지 않기로 했다.

 

리는 핀치와 함께 호주로 떠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비행기가 지연되는 동안에 올리비에가 그들을 따라잡아, 결국 리를 설득하여 런던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 스캔들 사건은 리의 친구였던 테렌스 래티건이 쓴 각본의 기초가 되었다. 그 결과 1963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주연을 맡은 영화 '예기치 못 한 일'이 개봉되어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올리비에는 리가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여러 불륜에 연루된 것이 당시에는 잘 이해되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양극성 장애의 증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리는 전기충격 요법을 통해 증상을 완화하려 했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고, 조울증으로 성적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고 혼외정사로 이어졌다.

 

비비안 리, 정신 악화

리는 소란스러운 할리우드에서 멀리하기 위해 관계자들은 실론섬에 촬영될 예정인 '거상의 길'에 밀어 넣었다. 이 영화에는 리와 열애를 거듭했던 피터 핀치가 주연을 맡았다.하지만 촬영장에 도착하자 리의 망상 장애는 극에 달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핀치를 쫓아다니며 그를 '래리'라고 부르며 애정을 드러냈다. 결국 그럴 때 올리비에가 소환되었지만 리와 핀치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관계를 목격한 후, 그는 체념을 하고 핀치의 보살핌에 맡겼다.

 

리와  핀치는 햇볕이 내리쬐는 프랑스 남부의 해안에서 위안을 찾았다. 리의 상태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그녀는 일관성 없는 횡설수설과 환각에 시달렸고, 심지어 밤에는 알몸으로 정원을 돌아다니다 발각되기도 했다. 리는 여러 파트너의 품에서 위안을 얻으며 할리우드의 호화로운 파티에 참석해, 젊은 신예 배우들을 소개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부담이 커진 핀치는 결국 더 이상 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았다.

이 기간 리는 올리비에와 셰익스피어 연극에 계속 함께 나왔다. 전반적으로 평이 좋진 않았다. 공교롭게 1956년 노엘 코워드의 '남해의 포말'을 공연하던 중 리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한 그녀는 작품에서 하차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공연 마지막 날, 리는 유산을 겪었으며 장기적인 우울증에 빠졌다. 그녀는 동료 배우들을 향해 좌절감을 쏟아냈었다.

 

비비안 리, 올리비에 별거

올리비에와 리는 '왕자와 무희'에 캐스팅됐다.비비안 리가 맡은 배역은 당대의 섹시 아이콘 마릴린 먼로가 대신 배역을 쥐었다.비비안 리는 배역을 빼앗겼다는 분노보다도 마릴린 먼로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할까 걱정됐다고 한다.결국 비비안 리는 매일 영화 촬영장에 찾아갔었고,그녀는 극도록 예민해져 남편과 마릴린 먼로가 영화 때문에 키스신을 촬영 할때마다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결국 리의 집착에 올리비에는 1958년 별거에 들어갔다. 올리비에는 배우 조안 플로라이트와 만났고, 리는 배우 잭 메리베일과 동거를 시작했는데, 메리베일은 올리비아에에게 폐결핵 환자인 비비안 리를 자신이 잘 돌보아주겠다고 약조했다.

1960년 리는 올리비아에게 자살 협박까지 들먹였지만, 결국 그해 두 사람은 이혼했다.

 

*비비안 리는 전 남편이 30살 연하의 조안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비비안 리 말년

이혼 후에도 올리비에와 리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며 애틋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배우자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은 두 사람이 함께 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비비안 리는 '바보들의 배'(1965)를 마지막으로 영화에 진출했다. 촬영 과정에서 리는 망상 장애로 어려움을 겪었고 동료 배우들과 많은 갈등을 겼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타락한 남부 미녀 연기를 했다. 리의 연기는 많은 찬사를 받았었다.

 

인생의 황혼기에도 세계 공연 예술의 중심지인 브로드웨이 무대에 계속 오르며 잊히지 않는 배우로 남기 위해 노력했다.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열정인 연극 무대를 자주 밟지 못했다.

 

올리비에 에와의 이혼 후에도 리는 머리맡에 올리비에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했었고, 동반자였던 메리베일도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 리는 '올리비에 부인'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했으며 친한 친구에게 메리베일과의 긴(평안한) 삶보다도 올리비에와 짧은 삶을 살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었다. 올리비에 또한,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던 것 같다. 올리비에는 죽기 몇 주 전 비비안 리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라고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비비안 리 사망

1967년 7월 8일 비비안 리는 에드워드 알비의 '미묘한 균형'에서의 배역을 준비하던 중 폐결핵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메리베일의 연락을 받은 올리비에는 곧바로 리의 집으로 가 그녀의 시신이 누워 있는 침대 곁에서 과거의 둘 사이에 벌어졌던 그 모든 죄악에 대한 신의 용서를 간구했다.라고 한다. 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웨스트엔드 극장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조명을 소등하며 그녀를 추모했다.


가톨릭 장례식은 런던 캐더건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서 열렸다. 리의 전 배우자였던 홀먼과 올리비에가 런던의 성공회 교회인 세인트 마틴 인 더 필드에서 메리베일이 주최한 추모식에 참석했다. 그녀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그녀의 유골은 여름 휴양지인 이스트 서섹스의 티커리지 밀 호수에 뿌려졌다.

 

*죽은 그녀의 손엔 로렌스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비비안 리의 유산은 그녀의 뛰어난 연기뿐 아니라 그녀의 비할 데 없는 재능과 매혹적인 존재감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녀의 외동딸이던 수잔 리 홀먼은 작가와 배우로 활동했었다. 수잔 리 홀먼은 2015년 8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리의 핏줄을 이어받은 세 명의 손자를 남겼다.

 

*아래는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의 일부 공개된 편지 내용이다.

올리비에·비비안 리 “당신은 제 인생의 모든 것” 연서 첫 공개 | 중앙일보 (joongang.co.kr)

 

올리비에·비비안 리 “당신은 제 인생의 모든 것” 연서 첫 공개 | 중앙일보

1940년 열린 제1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비비안 리가 연인이던 로렌스 올리비에를 다정하게 쳐다보고 있다. [중앙포토]“당신을 향한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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